배움/독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Stage2 2013. 8. 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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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은 피터 드러커와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다.

 

그는, 나치가 득세할 즈음 영국으로 건너간 피터드러커와는 달리 오스트리아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중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여러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어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고 갔었던 3여년간의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작가는 감옥에서의 수감생활은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라고 말한다.

 

프랭클은 실제 경험을 통해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 동안 배워 왔던 교과서적 지식이 거짓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잠을 일정한 시간 자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과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은 모두 교과서에서 인간의 한계를 단정지어 놓은 것일 뿐인 것이다.

 

혹독한 냉방의 감옥에 무려 9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닥위에서 단 두장의 담요를 덮고도 잠이 밀려 왔으며, 그 잠은 비록 몇 시간 동안이지만 그들에게는 고통을 잊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또한 얼마나 그 상황을 잘 견뎠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를 닦을 수 없음에도 잇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으며, 흙일을 하다가 찰과상을 입어도 동상에 걸린 경우를 제외하면 상처가 곪는 법이 없었다.

 

이러한 죽음의 수용소 생활 끝에 살아 남을 확율이 28명 중 1명도 안되는 낮은 가능성 속에 살아 남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 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고테라피란

 

로고테라피의 로고는 Logos라는 그리스어의 '의미'라는 단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말그대로 인간 존재의 의미는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하는 일은 화가보다는 안과 의사가 하는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 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 주려고 노력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사랑의 의미)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시련의 의미)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ㄱ돗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 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의미를 발견하는데 반드시 시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디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역설의도

 

마음속의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땀을 흘리는 것에 대해 공포증이 있는 환자에게 오히려 땀을 많이 흘리게 될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일부러 사람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릴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는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대신 그 반대되는 소망이 들어가 불안이라는 돗대에서 바람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타고난 우머 감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활용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 역설의도라고 하는 로고 테라피의 치료기법이 적용 될 때마다 발휘도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거리두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의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하지만 특히 예기불안 때문에 생기는 강박충동 상태와 공포증을 치료할 때에는 이 기법이 매우 유용하다. 이것은 단기치료법이다. 가장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는 역설의도는 발병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비극속에서의 낙관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두번째 인생을 사는 것 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유용성보다 우월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인간의 존엄성을 단순한 유용성과 혼동하는 것은 개념상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품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프로이트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호나자는 빅토리아 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워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수요소에서 '개인적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10시 52분 양 재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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