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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혼 그리고 육의 차이

Stage2 2014. 10. 20.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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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영의 분별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 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 사람은 세 부분으로 됨

모든 동·서양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두 부분, 바깥 부분과 내적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깥 부분은 신체적인 부분, 몸이고 내적인 부분은 심리적인 부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심리적인 부분들을 혼 또는 영이라 불렀다. 중국인들은 이상하게 들리는 「영혼」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있다. 불신자들은 영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들은 사람은 단지 몸과 혼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혼이라고 부르든지 영이라고 부르든지 그들에게는 똑같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사람은 단지 외적인 신체적인 부분과 내적인 심리적인 혹은 영적인 부분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들은「혼」과 「영」이 성경에서 동의어라고 믿으며 혼이 영이고 영이 혼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심리적인 부분은 영적인 부분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영적인 것이 심리적인 것이요, 심리적인 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우스운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단지 두 부분이 아니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신약 가르침들에서는 영과 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사람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잘못된 관념을 분명하게 조정한다. 이 구절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우리 존재의 한 부분만이 아닌 모든 부분들, 영과 혼과 몸 안에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헬라어 문맥에서 영과 혼과 몸은 세 명사들과 「그리고」를 의미하는 카이(Kai)라는 두 개의 접속사로 구성된다. 이것은 이 세가지 명사들이 세가지 다른 항목들을 나타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영은 혼이 아니며 혼은 몸이 아니다. 혼은 몸과는 다른 어떤 것이고 영은 혼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인간이 영, 혼, 몸을 가진 세 부분으로 된 존재라는 온전하고도 충만한 계시를 갖는다. 여기에서 성령은 이 세 항목들에 대한 합당한 질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영이 첫번째요, 혼이 두번째요, 몸이 마지막이다.
가장 안쪽 부분은 영이요, 바깥 부분은 몸이요. 이 두 부분 중간에는 혼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세 부분들로 창조하셨는가를 보여준다. 첫째,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부터 사람의 몸을 만드셨다. 그 다음에 그분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고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 사람이 창조에 사용된 첫번째 물질은 흙이었고 두번째 항목은 생명의 호흡이었다. 하나님은 몸을 만드시는데 흙을 사용하셨고, 몸 안에 영을 만드시는데 생명의 호흡을 사용하셨다. 몸 안에 있는 영이 몸과 연합될 때, 세번째 항목인 산 혼이 존재하게 되었다.
사람은 단지 몸만도 아니고 영만도 아니다. 천사들은 영이지만 우리 인간들은 천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을 몸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우스운 것이다. 사람은 혼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경은 종종 인간들을 혼들로 언급한다. 출애굽기 1장 5절은 『야곱의 후손이 모든 칠십 혼이었더라(원문참조)』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상반절은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원문참조)』고 말한다. 우리 인간들은 세 부분들로 만들어 졌다. 우리는 두 가지 추가적인 부분들을 가진 혼으로 만들어 졌다. 우리는 외적인 몸을 가지고 있고 내적인 영을 가지고 있고 그 중간에 혼이 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이것을 연구하는데 보내야 한다. 어떤 문제들에서 우리는 단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아는데 있어서는 단순하지 말고 섬세해야 한다.

2. 우리 존재의 세 부분들에 의해 세 세계들을 접촉함

우리 인간들은 세 부분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 세계인 신체적 세계, 심리적 세계, 영적인 세계를 접촉할 수 있다. 우리 몸 안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으로 우리는 신체적인 세계 안에 있는 물질적인 것들을 접촉한다. 신체적인 세계 이외에 심리적인 세계가 또한 있다. 심리적인 세계는 기쁨과 슬픔을 포함한다.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으로는 심리적인 세계를 만지거나 접촉 할 수 없다.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할 지 모르나 기쁨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또는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신체적인 세계가 아닌 심리적인 어떤 것이다. 「심리적인」의 영어 단어는 혼을 의미하는 헬라어 「푸쉬케」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명사 「혼」의 형용사 형태인 「혼적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심리적인 세계는 단순히 혼적인 세계, 혼의 세계이다.
신체적인 세계와 심리적인 세계 이외도 세번째 세계, 영적인 세계가 있다. 하나님과 천사들은 신체적인 세계 심지어 심리적인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혼이 아니고 영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영적인 세계에 속하신다.
인간은 신체적인 부분인 몸의 오감으로 신체적인 세계를 만지거나 접촉한다.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세계도 우리 존재의 심리적인 부분, 혼에 의해 접촉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혼의 부분들인 생각과 감정에 의해 기쁨과 슬픔을 갖음을 깨닫는다. 세번째 세계인 영적 세계는 우리의 영에 의해 접촉한다. 요한복음 4장 24절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 안에서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원문참조)라고 말한다. 우리는 몸이나 생각과 감정이 있는 혼에 의해 경배하지 않고 영에 의해 경배한다. 하나님은 신성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사람의 영에 의해 사람의 영 안에서 이 신성한 영을 접촉해야만 한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접촉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의해서와 영적인 부분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형제를 접촉하는 방식에서 세 종류의 접촉, 신체적 접촉, 심리적 접촉, 영적인 접촉을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악수한다. 이것은 우리의 신체적 부분, 몸에 의해 신체적 세계를 접촉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를 신체적 부분만이 아니라 또한 심리적 부분에 의해서도 접촉한다. 형제가 집에서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악수를 하는 동안에도 기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즐겁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이러한 종류의 느낌은 손안에 즉, 몸 안에 있지 않고 혼의 생각 안에 있다. 다음에 우리 두 사람은 기도하기 위해 무릎 끓을 때 그의 가장 깊은 부분, 그의 내적 부분에서 나온 어떤 것을 말할지 모른다. 우리가 그의 가장 깊은 부분, 가장 내적인 부분에 있는 것을 느낄 때 그의 영 안에 있는 것을 우리 영 안에서 느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그가 사실상 우리에게 즐겁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첫번째 우리는 형제와 악수한다. 이것은 신체적인 접촉이다. 다음에 우리는 그에 관한 어떤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것은 심리적인 접촉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그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것에 관해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 안에서 어떤 것을 느낀다. 이것이 영적인 접촉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존재의 서로 다른 세 부분들―영, 혼, 몸―을 분별할 수 있다. 혼이 몸과 절대적으로 다르듯이 영은 혼과 절대적으로 다르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형제와 심리적인 접촉도 없고 심지어 더욱 영적인 접촉도 없이 단지 신체적인 접촉만 갖는다. 다른 때에 우리는 신체적인 접촉과 약간의 심리적인 접촉 또한 갖는다. 어떤 때에는 영적인 접촉도 없이 심리적인 접촉을 너무 많이 가질지 모른다. 나는 수년동안 주님에 의해 매우 많이 가르침을 받았다. 아주 여러 차례 내가 형제 자매들을 접촉할 때 그들은 다만 심리적인 부분에 의해 많이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 그들을 영적인 접촉에 의해 접촉한다. 우리가 성도들을 접촉할 때 그들은 우리의 심리, 혼, 생각, 감정, 의지에 의해 접촉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비록 그들을 우리의 몸으로 조금 접촉했을 지라도 우리 영으로 그들을 접촉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 형제가 『저랑 악수합시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나는 신체에 의해 당신을 접촉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단지 영 안에서만 접촉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들을 약간 신체적으로 접촉해야 하지만 거의 대부분 영 안에서 접촉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을 접촉하도록 우리의 영을 훈련하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3.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

혼과 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혼은 분리될 수 있으며 또한 영으로부터 나누어져야 한다. 고린도전서 2장 14-15절은 혼이 영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고 영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혼은 영에 대항하며 영을 반대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구절은 『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혼에 속한』이라는 것은 천연적인 또는 심리적인 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혼에 속한 사람은 천연적인 사람이며 혼 안에 사는 사람이다. 혼은 절대적으로 영적 일에는 무력하다.
이 두 구절들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 즉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볼 수 있다. 혼적인 사람과 혼 그 자체는 신령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고, 받을 수 없고 심지어 성령의 일들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들을 분별하고 영적인 것들을 받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것은 영에 의해서이고 영적인 것들을 갖기를 갈망하는 것은 이 영 안에서이다. 우리가 혼적이라면 전혀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영적인 것도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영적인 것들을 미련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혼 그 자체는 영과 반대된다. 우리는 이것을 체험에 의해 깨달을 수 있다.

4. 자아를 부인함

우리 몸 안에는 두 부분 혼과 영을 가지고 있다. 혼 그 자체로는 영적인 것을 갈망하지 않으며 영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영과 매우 반대된다. 더욱이 마태복음 16장 24-25절은 혼이 자아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구절들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혼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혼 생명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한다. 24절은 『자기를 부인함』을 말하고 25절은 『혼 생명을 잃음』을 말한다. 25절에 있는 혼 생명은 24절에 있는 바로 그 자아이다. 우리는 우리의 혼이 사람의 영과 반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의 영이 전존재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며 그곳에 성령이 거하며 더 많은 것을 이해하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과 반대되는 것이 우리의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자아 즉 혼적인 생명은 세 부분들인 생각, 감정, 의지로 구성된다. 감정은 사랑과 미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생각은 사상, 고려, 의견, 아이디어, 관념을 가진 정신력이다. 자아 안에는 또한 결심, 선택, 결정하는 의지가 있다. 우리가 이 세 부분들―생각, 감정, 의지―이 자아, 혼의 세 부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 단순히 이 세 가지 것들을 부인하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많은 때에 우리는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 생각,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다.
혼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감정, 생각,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사람은 의지 안에서 매우 강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도 그를 납득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강한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형제는 의견이 아주 많고 사상이 매우 깊고 어떤 자매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혼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혼적인 사람은 감정적인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이요,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우리가 감정적이면 감정적일수록 더욱 혼적이다. 우리 생각 안에 너무 많이 있거나 생각을 첫 번째로 사용하거나 우리 의지 안에 너무 많이 있는 것 또한 혼적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강한 사람이 그의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의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다. 생각이 너무 깊은 형제가 그의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 그의 지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의 머리를 잃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자매들이 그녀의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그녀의 감정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점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고려하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세 범주에 속함을 볼 것이다. 때때로 특별히 자매들은 감정적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매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와 논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역사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다만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것이 전쟁에서 싸우는 가장 좋은 무기이다. 여러분이 눈물 몇 방울 떨어뜨린다면 모든 자매들은 사로잡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자매에게 발생할 때 그녀는 거의 대부분 맨 먼저 감정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영적인 사람은 그녀의 자아로부터 구출된 감정적인 자매이다. 어떤 일이 그녀에게 발생할 때 맨 먼저 그녀의 감정이 아닌 가장 깊은 부분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올 때 그녀는 눈물에 의해 감동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매일지라도 그녀는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그녀의 가장 깊은 부분을 사용하고 눈물이 있을지라도 그녀의 감정을 부인한다. 그녀는 눈물을 주의하지 않고 주님이 거하시는 그녀의 영을 사용한다. 이것이 감정적인 자매가 아닌 영적인 자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자매들에게 있어서 매우 어렵다. 자매들은 형제들을 그들의 대리로 취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모든 자매들은 그들의 감정을 대리로 취한다. 자매들이 그들의 감정을 발아래 두고 그들의 영을 훈련하여 영을 그들 존재의 머리로 삼으려 한다면 그들은 영적일 것이다.
자매들에게 문제는 감정이지만 형제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지력이다. 대부분의 형제들은 언제나 생각하고 고려하는 큰 머리를 가지고 있다. 많은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의견에 있어서 큰 교사들이다. 형제들은 많은 사상들, 의견들, 고려들,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이 형제들에게 발생할 때 그가 자연스럽게 맨 먼저 하는 것은 그의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형제에게 집회를 위해 기도하라고 요청한다면 『우리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자매들은 종종 눈물을 글썽이지만 형제들은 눈을 굴린다. 그들이 눈을 굴리고 있는 동안에 그들의 생각이 사용되고 사고되고 고려된다. 사상들과 고려들 안에 있는 형제들을 설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그들과 논의하고 논쟁해야만 한다. 그들에게는 설득 당할만한 강한 논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 안에 더 많이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 가운데 적은 수만이 의지의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감정들이나 고려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순히 그들의 의지를 정하는 것만 안다. 일단 의지가 정해지면 아무도 그들을 바꿀 수 없다.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영과 연결되어 있다면 매우 놀라울 것이다. 이러한 강한 사람들은 매우 신실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강한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의지가 영에 굴복될 필요가 있다.
출처  한국복음서원 『생명의 체험을 위한 기본원칙』 8장 중에서

 

 

 

 

 

신과 영은 구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사실상 신과 영의 구별이 없습니다.

예를 영을 신이라고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성령을 성신이라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영을 하나님의 신이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과 영은 다른 것입니다. 곧 정신과 영은 다른 것입니다.
영은 하나님에게 영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영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은 인간의 구성 요소입니다.

육과 영은 생명에 의하여 결합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영과 육을 결합시키는 결합에너지와 같은 것입니다.

정신이란 산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신은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자 제품에 전기가 통하여야야 작동을 하듯이 사람도 생명 곧 생기가 있어야 그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신 곧 하나님은 최고의 명령자이며 다스리는 통치자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됩니다.

곧 정신 상태에 따라 그 모든 것이 달라짐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주관하는 것은 영입니다. 곧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합니다.

살린다는 것은 생명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인간의 구성요소이나 정신은 영과 육이 생명에 의하여 결합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기능입니다.

 

출처 네이버 ID : cjh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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